왜 우리는 쉽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해본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잠깐 멈춰 선 순간, 그 말이 마음속을 맴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휘둘리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 ‘지금 이게 진짜 내가 바랐던 모습일까?’, ‘내가 선택한 삶이 맞을까?’ 그렇게 우리는 조용한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 물음표는 점점 깊어져 어느 순간 감정의 언저리를 건드린다. ‘살고는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어쩌면 그것은 삶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사람에게 덜 휘둘리고 싶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저 평온한 하루가 간절하다고 말한다. 원하는 삶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쉽게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조건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더 진심으로 꿈꿔왔는데도 이상하게 그 삶은 멀기만 하다. 바라는 마음은 분명한데, 걸음을 내딛으려 하면 자꾸 멈칫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나는 왜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걸까?”
이 질문은 단지 삶의 외적인 실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구조와 깊은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패턴에서 시작된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바깥의 환경보다 내 안에 뿌리내린 믿음, 감정, 관념, 그리고 반복되는 반응들이다. 내가 무엇을 바라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바람을 얼마나 허락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고, 그러나 절대로 가볍지 않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내린 오래된 결론들 때문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언젠가는 하겠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라는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은 나를 오늘도 제자리로 데려다놓는다. 지금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조용하고 깊은 응답이다. 원하는 삶이 왜 쉽지 않은지, 그리고 그 삶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섯 가지 마음의 구조로 함께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변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글이 당신이 원하는 삶을 더 가까이 바라보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그 삶을 살아도 된다는 것을, 지금의 나에게 허락하는 일.
1.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일에는 늘 머뭇거린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그게 행복한 삶이다’라는 사회적 기대와 가족의 기준 속에서 무언가를 향해 달려왔다. 부모가 좋아하는 직업,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 사회가 말하는 안정된 미래를 좇으며 어느새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느낄 기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바람은 누군가의 기준에 의탁한 채 ‘내 것인 줄 알고 살아온 타인의 욕망’으로 채워지게 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적당한 연봉, 괜찮은 배우자, 이 모든 것들을 갖추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허전함은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원한다고 믿은 채 살아왔던 시간’이 쌓인 결과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뤘을 때만 행복하다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래서 목표는 분명한데, 그 목표가 정말 나의 깊은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결핍을 채우기 위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원하는 삶이란 결국, 나의 중심에서 나를 향해 열리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중심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방향만 설정한 채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좋은 삶’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수많은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나를 잃어간다. 학교에서는 진짜 하고 싶은 것보다 점수 잘 나오는 과목을 선택했고, 직장에서는 적성보다 조건을 택했다. 인간관계도 비슷하다. 내가 편한 사람보다 ‘어울리는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렇게 삶의 대부분이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실은 선택당한 것들’로 채워지고, 결국 어느 순간 무기력함과 공허함이 찾아온다. 삶이 낯설어지고,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드는 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아니라, 익숙하게 주입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성공하고 난 뒤에 더 큰 혼란을 겪는다. 다 가졌는데 왜 공허할까? 부러움 속에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것은 내가 쌓은 삶의 탑이 내 마음의 설계도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남들이 준 도면에 따라 억지로 맞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원하는 삶은 ‘해야 할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한다’에 길들여진 나머지, ‘살고 싶다’는 말이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타인의 꿈을 내 것처럼 살아가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상하게 공허하고, 반복되는 불만 속에 이유 없는 피로를 느낀다. 이쯤에서 우리는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진짜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길은 내가 원한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인가?”, “이 꿈은 정말 내 안에서 피어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한 방편인가?” 이 질문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답을 알게 될수록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이룬 것이 사실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인식 없이는, 원하는 삶에 도달할 수 없다. 진짜 원하는 삶은 지금까지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는 일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습관 하나를 바꾸는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진짜 ‘내가 선택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선택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어떤 길을 택할지, 어떤 감정을 따를지, 누구와 함께할지, 그리고 무엇을 포기할지. 그 모든 선택이 모여 결국 내 삶의 형태가 된다. 원하는 삶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섬세한 ‘정직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진짜 원하는 삶은 원대한 포부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 묻는 단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금 이 선택은, 진짜 나를 위한 것인가?”
2. 무의식 속 자격 없음의 패러다임 때문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능력이 부족해서도, 환경이 열악해서도 아니다. 진짜 이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무의식 속 패러다임 때문이다. 마음은 겉으로는 ‘원해, 바라고 있어’라고 말하지만, 그 밑에 숨은 무의식은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감히?”, “그건 너 같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와도 움츠러들고, 원하는 걸 얻어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망설이거나 그 자리를 피한다. 이 자격 없음의 믿음은 삶을 스스로 제한하게 만든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믿음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다. 어릴 적 실수 하나에 “그게 뭐야,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야?”라고 꾸중받았던 경험, 아무리 잘해도 비교당하며 “넌 왜 언니처럼 못 해?”라는 말을 듣던 순간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대신 기준을 내걸고 조건을 걸던 어른들의 말투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나는 지금의 나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결론은 곧 하나의 무의식 패턴이 되어 자라난다. ‘나는 더 잘해야 한다’, ‘나는 인정받아야만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부족하다’라는 메시지가 반복되며, 우리는 점점 스스로를 작게 만든다. 자격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의 패러다임은 단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삶 전체에 영향을 준다. 취업을 앞두고 좋은 기회가 와도 “나 같은 사람이 이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연애에서도 상대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언젠가 나를 떠날지도 몰라”라는 불안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과를 내도 “운이 좋았던 거야”, “다음엔 못할지도 몰라”라는 자기불신이 그 기쁨을 덮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자격 없음의 패러다임이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어딘가 결함이 있으며, 그래서 원하는 삶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바로 원하는 삶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내면의 장벽이다. 그리고 이 장벽은 한 가지 특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겉으로는 늘 최선을 다하고, 인정받으려 애쓰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스스로를 의심한다. 누구보다 많은 걸 해내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말한다. “넌 잘하고 있어”, “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더 불편하고 민망하다. 왜냐하면 내 안에서는 ‘나는 여전히 부족해’라는 믿음이 더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이제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내가 원하는 삶 앞에서 자꾸 주저하고, 물러나고, 망설이는 이유는 외부 조건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내린 오래된 낙인. “너는 안 돼”, “너는 아직 멀었어”, “너는 받을 자격이 없어.” 이 믿음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치유해야 할 상처다. 자격 없음의 패러다임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에 내가 너무 오래 머물러 생긴 ‘해석’일 뿐이다. 이제는 그 해석을 바꿀 시간이다. 나의 과거가 만들어낸 믿음이 지금의 나를 계속 가두게 놔둘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자격을 허락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직 부족해도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의 나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 말은 처음엔 어색하고 믿기지 않겠지만, 반복하고, 진심을 담고, 느끼려고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서서히 열린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을 마음속에서 품는 연습. 그것이 이 오래된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가장 따뜻하고 힘 있는 시작이다. 원하는 삶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허락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3. 두려움이 원하는 삶을 가로막기 때문
우리는 말한다.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나답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그 방향을 향해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마음 한켠에서 불쑥 올라오는 감정이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실패할 것 같고, 한 걸음만 옮겨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 같은 불안이 밀려온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머리는 갈망하고 있지만, 마음은 움츠러든다. 그리고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결국 지금의 삶에 다시 타협하고 만다. 익숙한 불만족 속에 머무는 것이다. 두려움은 무언가를 피하고 싶을 때만이 아니라, 정말 바라는 것을 마주할 때도 일어난다. 오히려 진짜 원하는 것일수록 두려움은 더 깊고, 더 크게 작동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진짜 선택하는 순간,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변화에는 언제나 손실이 따르고, 그 손실 앞에서 우리는 막연한 위협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어쩌지?’, ‘다시는 기회를 못 얻으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수많은 시나리오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점점 실제보다 커지며 나를 붙잡는다. 결국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삶이 그래도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 다시 몸을 숨긴다. 예를 들어, 지금 다니는 직장이 나와 맞지 않고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막상 퇴사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배 속이 싸늘해진다. ‘그만두고 나서 뭐 하지?’, ‘다음 일은 있을까?’, ‘수입은 어떻게 메우지?’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결국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고, 불만족스러운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가 나를 병들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냐하면 그것이 덜 무서우니까. 덜 불확실하니까. 그래서 원하는 삶은 늘 ‘내일’로 미뤄지고, 우리는 오늘도 ‘익숙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나를 소진시키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끊는 것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다. 거절하는 것, 혼자가 되는 것, 미움받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그 사람과 계속 얽혀 있게 만든다.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두려움은 종종 이렇게 위장된 방식으로 나를 속인다. ‘너무 급하게 판단하지 마’, ‘조금만 더 참아봐’, ‘지금 놓으면 후회할지도 몰라.’ 이런 말들은 마치 현명함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는 핑계에 가깝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삶으로 가지 못하는 건 능력이나 기회의 부족이 아니다. 바로 두려움을 안전함으로 오해하는 내면의 패턴 때문이다. 익숙한 불행이 낯선 자유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역설적인 마음의 작동.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묶여 있는 줄도 모른 채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나에게 이렇게 정당화한다. “지금도 나쁘진 않잖아”, “누구나 이런 고민은 하잖아”, “좀 더 준비되면 움직이자.” 하지만 준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진짜 원하는 삶은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 오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끌어안고 움직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두려움은 당연하다. 오히려 없는 것이 이상하다. 중요한 건 두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두려움은 나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일 뿐이고, 감정은 흘러간다. 내가 지금 이 선택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어쩌면 지난 상처와 실패의 기억에서 비롯된 감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다. 나는 자라났고, 배웠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충분히 성장해왔다. 그러니 이제는 두려움을 핑계로 나를 미루지 않아도 된다. 그 삶을 살아도 되는 나,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나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괜히 시작했다가 상처만 남으면 어떡하지?”, “모든 걸 걸었다가 실패하면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몰라.”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고 해서, 지금 이대로가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두려움과 함께 나아가는 연습이, 나를 원하는 삶에 데려다준다. 두려움은 방향을 틀게 만드는 적이 아니라, 나에게 “이 길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내 안의 진심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기 때문인가?” 이 질문이 진짜라면, 그 다음 걸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두려움을 끌어안고도 한 발 나아가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원하는 삶으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문은 오늘도 조용히 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는 내가 손을 뻗는 일만 남았다.
4. 비교와 관념이 ‘내 삶’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
우리는 늘 누군가의 삶을 보고, 그 삶과 내 삶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며 산다. SNS 속 반짝이는 일상, 친구의 성취, 동료의 속도, 주변 사람들이 쌓아 올리는 결과와 그에 따라오는 박수 소리를 들을 때면, 괜히 마음이 작아지고 나의 하루는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나는 왜 아직 여기일까’, ‘나는 왜 저만큼도 안 되는 걸까.’ 그렇게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대신, 남의 삶에 나를 자꾸 끼워 맞추려 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속도에 흔들리고, 타인의 성과에 좌우되며,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측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내 삶은 점점 흐려지고, 나의 감정은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비교는 본능일 수 있지만, 그것에 휘둘리는 순간 자존감은 빠르게 무너진다. 더 무서운 건, 비교는 나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를 정지 상태에 가두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나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혼동하고, 부러움 속에 나를 숨기며, 누군가의 삶을 꿈꾸면서 정작 나의 삶은 멈추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기 시작하면, 나의 고유한 욕망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나는 나로 살지 못한다. 나의 선택도, 나의 방향도, 나의 목소리도 모두 흐려진다. 그렇게 내 삶은 내가 아닌 관념으로 살아지는 삶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일까?”, “이 나이에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하지만 이 질문 속에는 이미 타인의 그림자가 묻어 있다. ‘괜찮다’는 말은 결국 비교를 통해서만 나오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삶이 자꾸 불안해진다. 기준은 명확하지 않고, 비교는 끝이 없으며, 누군가를 따라잡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앞서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 채, 나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남게 된다. 아무리 달려도 마음은 허기지고, 성취해도 삶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아닌 기준’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념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이 나이엔 이렇게 해야 해’, ‘이 정도면 당연히 가져야 해’,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선택을 해야 맞지.’ 수많은 ‘~해야 한다’는 말들이 삶을 조여온다. 그리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죄책감이 밀려온다.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이미 나의 삶 전체가 관념의 프레임 안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욕망을 의심하고, 기쁨을 미루고, 감정을 숨기며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이유다. 비교는 나를 밖으로 흐리게 만들고, 관념은 나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비교와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삶을 무시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선을 다시 내 삶으로 돌리는 일이다.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순간에 마음이 뛰었는지, 어떤 일을 할 때 시간이 멈춘 듯 몰입했는지를 기억하는 것. 그 조용하고 섬세한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잘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 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은 비교의 시선을 걷어내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나는 충분한가?”라는 질문 대신,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 답은 외부에 있지 않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스스로에게 “응, 나는 지금 나의 삶을 살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삶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나를 기준으로 삼고, 나의 목소리를 따르고, 나의 감정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삶은 나의 것이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누군가가 아니라 ‘나로서 존재하는 삶’을 살게 된다.
5. 원하는 삶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기 때문
우리는 말한다. “나는 이런 삶을 원해”, “언젠가는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말한 뒤, 우리는 대부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일상의 습관 속으로, 늘 하던 루틴 속으로, 이미 익숙한 고민들 속으로. 머릿속으로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가슴으로는 그것을 열망하지만, 실제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하루가 또 쌓이면, 삶은 어느새 똑같은 자리에 정체되어 있다.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다섯 번째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머무르고, 몸은 움직이지 않으며, 변화는 오지 않는다. 진짜 변화는 언제나 아주 사소한 행동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고 느린 변화를 무시하고, 한 번에 인생이 바뀌는 극적인 전환만을 상상한다. 그래서 준비만 하다 시간이 흐르고, 생각만 하다 기회를 놓치고, 말만 하다 마음마저 지쳐버린다. 예를 들어,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은 많지만, 오늘 단 한 줄도 쓰지 않는다.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잠깐의 스트레칭이나 물 한 컵의 여유조차 실천하지 않는다. 행복한 관계를 원하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을 미룬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말한다. “그게 마음처럼 안 돼서요.” 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아니라, 습관이 바뀌지 않았을 뿐이다.
원하는 삶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이 만든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보다, 오늘 나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 아주 작은 습관 하나가 쌓여 결국 나를 바꾸고, 그 바뀐 내가 결국 다른 삶을 만든다.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그들은 실천했다는 점이다. 두려움이 있어도, 조건이 안 맞아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결국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생각만 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야”, “더 준비되면 할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멈춘다. 그리고 그렇게 멈춘 시간이 반복될수록, 원하는 삶은 점점 멀어지고 만다. 우리는 종종 실천을 거창하게 오해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해야만, 이사를 가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만,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그런 큰 결단 이전에, 작은 정직함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에게 솔직해지는 일. 내가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작은 변화로 연결시키는 용기. 예를 들어, SNS를 끊고 내 생각을 적는 노트를 펴는 일, 불필요한 만남 대신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일, 누구도 몰라도 내 마음을 돌보는 하루를 만드는 일. 그 모든 것이 ‘원하는 삶’의 출발점이 된다.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은 곧 행동이다. 오늘 내가 한 행동은,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말해준다. 나는 입으로는 원하는 삶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삶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살고, 사랑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내 감정을 숨기며, 안정된 삶을 말하지만 내 마음은 늘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말과 삶이 멀어질수록, 나는 나에게서도 멀어진다. 그리고 그 단절은 슬픔과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묻게 된다. “나는 왜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까?”라고. 이제는 그 질문을 다르게 바꿔보자. “나는 오늘, 원하는 삶을 위한 어떤 행동을 했는가?”, “내가 바라는 삶에 어울리는 태도를 지금 내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 대답은 작을 수 있고, 어설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직한 대답 하나가 삶을 바꾸는 씨앗이 된다. 오늘 한 번 나를 위한 질문을 던지고, 아주 작게 실천해보는 것. 그것이 반복되면 삶은 어느 순간 달라져 있다. 원하는 삶은 멀리 있는 목적지가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디에 힘을 주는지를 따라 흐르는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만 정해진다.
원하는 삶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정직해지는 순간 시작된다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삶을 진짜 살아내기까지는 수많은 감정의 벽과 마주해야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조차 모르고, 무의식 속 자격 없음의 믿음에 붙잡혀 있고, 변화 앞에서 두려움에 멈춰서며,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나를 작게 만들고, 결국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만 삶을 설계하고 있다. 그 모든 마음의 구조와 감정의 패턴이 하루하루 나를 원하지 않는 삶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왜 나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까?”라고. 하지만 정답은 언제나 그 안에 있었다. 삶은 바깥의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패러다임이 만든다. 내가 나에게 무엇을 허락하고 있는지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비교당하고, 평가받고, 조건을 내세우는 세상 속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품으면서도 동시에 “이건 나한테 과한 거야”,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는 말로 스스로를 가로막는다. 두려움은 계속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익숙한 틀 안에 머무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익숙한 감정의 진자 끝에서, 팬들럼은 조용히 나를 흔든다. 결국 원하는 삶은 사라지고, 살아낸 하루가 남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 선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그 의식은, 나에게 정직해지는 순간 깨어난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까?”에서 “나는 지금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로. 질문이 바뀌면 감정의 흐름이 바뀌고, 감정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작고 섬세한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오늘 나를 위해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흘려보내고, 중심을 되찾고, 남이 아닌 나의 기준을 따라 작은 실천을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쌓일 때, 우리는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아, 지금 나는 내가 바랐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원하는 삶은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나를 향한 단 하나의 정직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누구도 나 대신 그 삶을 살아줄 수 없다. 삶은 내 것이며, 선택도 내 것이며, 그 선택을 이끌어내는 감정과 믿음 역시 내가 만든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끌어안고도 나아가는 그 용기 안에 원하는 삶이 숨어 있다. 불완전하지만 진심인 실천, 흔들리지만 나를 향한 질문, 작지만 내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 나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되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 원하는 삶을 향해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이 조금씩 진짜가 되어가는 하루를 살아보자. 원하는 삶은 멀리 있지 않다. 늘 여기,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