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두 개의 마음을 다루는 연습 - 이해하는 나와 미워하는 나, 함께 안고 살아가기

마춤이 2025. 6. 23. 17:20

한쪽 감정만 선택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감정을 고르고 걸러내며 살아왔다. 참는 마음은 괜찮고, 터뜨리는 감정은 나쁘다고 배웠고, 이해하는 건 좋은 사람이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이해하자, 참자, 너그럽게 넘기자.” 하지만 정작 마음속에서는 다르다. 말은 참지만 마음은 상처받고, 이해하려 애쓰지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억울하고 서운하다. 그렇게 우리의 내면에는 ‘이해하는 나’와 ‘미워하는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 문제는 이 둘 중 하나만 살아 있게 두고, 나머지 하나는 늘 억눌러온 데 있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된 감정은 더 깊은 곳에서 살아남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오거나 현실의 문제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마음의 건강이란, 좋은 감정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 ‘좋은 나’만 키우는 게 아니라, ‘불편한 나’도 함께 안아주는 것. ‘이해하는 나’와 ‘미워하는 나’, ‘착한 나’와 ‘억울한 나’, 그 양극단의 감정을 동시에 품고 살아갈 수 있어야 진짜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두 마음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다뤄낼 수 있을까? 단순히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 우리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 감정을 어떻게 마주보고,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연습 말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마음을 동시에 다루는 5가지 실천법을 함께 나눠보려 한다. 이 글은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고 구체적인 연습들, 지금 당장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담았다. 마음을 공부하고, 마음을 돌본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존재하는 상반된 감정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이해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억울하지?’ 그런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나를 꾸짖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내 마음의 전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아주 작은 연습. 지금, 그 길을 함께 걸어보자.

두 개의 마음을 다루는 연습 - 이해하는 나와 미워하는 나, 함께 안고 살아가기

1.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

감정이 올라올 때 가장 먼저 작동하는 건 ‘느끼는 나’가 아니라 ‘판단하는 나’다. 화가 나면 “이건 참아야 해”, 서운하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나쁘지 않나?”, 질투가 올라오면 “내가 왜 이렇게 못됐지?” 하는 식으로 우리는 감정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평가하고 분류하려 든다. 이는 오랜 시간 사회화되어온 반응이기도 하다. 좋은 감정은 표현하고 나쁜 감정은 숨기는 것이 예의라고 배워온 우리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조차 ‘이건 괜찮고 저건 나빠’라고 구분하며 무의식적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억눌린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한 방식으로, 더 억눌릴 수 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감정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그저 느껴지는 것이며, 그 자체로 해석되기보다 존재 그대로 느껴지는 상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을 고르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느끼는 ‘나’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아, 지금 내 안에 화가 올라오는구나.” “이런 말에 내가 많이 서운했구나.” “지금 질투가 드는 걸 보니, 나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거구나.” 이처럼 감정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감정은 더 이상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신호’로 작동한다. 마음은 늘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 신호를 판단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뿐이다.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에 말을 걸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야기인지 차분히 들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판단 없는 감정 바라보기의 시작이다. 이 연습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감정이 생각보다 빨리 올라오고, 그 감정에 대한 ‘반응’이 자동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자신을 잃은 채 무의식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해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후회하고 자책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잠시 멈추는 연습’이다.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즉각 반응하는 대신,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내 안의 감정을 관찰하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에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을 때, 예전 같았으면 바로 감정을 표현하거나 억누르고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속으로 말해보자. “지금 내 안에 뭐가 일어난 거지?” “왜 이 말에 내가 상처를 받았을까?” “혹시 그 말이 아니라, 내가 오래 참고 있던 감정 때문은 아닐까?” 이런 식의 질문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나를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게 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감정에 휩쓸리는 것도 아닌, 그 사이에서 바라보고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연습을 자주 하다 보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예전 같으면 격하게 반응했을 상황에서도, 한 번쯤 멈추고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책이 아닌 이해가 생긴다. 또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 밑바닥에는 대개 억울함, 외로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 같은 더 깊은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대부분 너무도 인간적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에 다다른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감정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올라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돌보게 하려고 올라온 것이었다는 걸.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이 연습은 단순해 보이지만, 삶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바꿔놓는 시작이 된다.

2. 미워하는 나에게 다정하게 말 걸기

“이해해야지, 참아야지, 그럴 수도 있지.” 이 말들은 우리가 관계 안에서 자주 스스로에게 되뇌는 문장이다.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화를 눌러두고, 기꺼이 더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어딘가에서는 조용히 다른 목소리가 올라온다. “왜 나만 이해해야 하지?” “왜 늘 내가 참아야 해?” “나는 왜 미워하면 안 되는 거지?” 그 목소리는 우리가 자주 무시하고, 조용히 눌러놓는 감정, 바로 ‘미워하는 나’의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미워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괜찮다고, 나는 이미 용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감정은 말이 아니라 에너지로 나타난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고, 다시 마주쳤을 때 괜히 말이 짧아지거나, 피하게 된다면— 아직 그 마음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미워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연습은, 그 마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 너도 있었구나.” 이 단순한 인정이 상처 입은 감정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늘 ‘미워하는 나’를 억압해야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 억눌린 마음은 결국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더 아픈 장면을 만들어 현실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미워하는 나에게도 말을 걸어야 한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대하듯이. “그때 정말 많이 속상했구나.” “그런 대우를 받았을 때 얼마나 외로웠니.” “미워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지쳐 있었던 거지.” 이런 말을 내면의 감정에게 들려주면, 그토록 날카롭고 예민했던 마음이 서서히 말랑말랑해진다. 이 연습을 처음 시작할 때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더 나빠지는 거 아니야?’ ‘화를 키우는 건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을 억눌렀을 때는, 그 감정이 멈춘 게 아니라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 무의식 안에서 자라났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다정하게 말 걸기 시작하면, 감정은 안정되고, 자기 자리를 찾는다. 그제야 비로소 그 감정은 더 이상 '미움'이 아닌, ‘이해받지 못했던 내 마음의 일부’로 변한다. 하루 5분이라도 좋다. 혼자 있는 시간에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억울했던 일, 상처받았던 말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때 그 감정을 느꼈던 나에게 다정하게 말해주자. “그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속이 상했겠구나.” “그때 참았던 너, 참 기특하고 애썼다.” 이런 말은 외부의 어떤 위로보다 더 깊은 치유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가장 원했던 건 타인의 위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과 수용이었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고 품어줄 때, 우리는 내면에서 진짜 통합을 경험하게 된다. 한쪽 마음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감정까지 안아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진짜 강한 사람의 마음이며, 지혜로운 감정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다.

4. 갈등 상황에서 내면의 두 목소리 번갈아 듣기

우리가 누군가와 갈등을 겪을 때, 마음속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하나는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예민했나 보다”라고 말하는 너그러움의 목소리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왜 나만 참아야 해? 너무 억울해”라고 외치는 울분의 목소리다. 우리는 흔히 이 두 목소리 중 하나만을 선택해 행동하려 한다. 대부분은 이성적인 판단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해하려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감정적인 목소리는 애써 무시하거나 조용히 눌러놓는다. 그러나 갈등의 진짜 해결은 한쪽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목소리를 모두 충분히 듣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내면의 두 목소리를 번갈아 듣는 연습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감정적인 나를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세우거나, 반대로 이성적인 나에게만 역할을 부여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습은 의외로 단순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았을 때, 종이에 두 개의 칸을 만들어 왼쪽에는 ‘이해하려는 나’의 말을 쓰고, 오른쪽에는 ‘미워하는 나’의 말을 써본다. “그 사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라는 문장 옆에,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라는 문장을 적어보는 것이다. 이처럼 나의 두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글로 써보는 것도 좋고, 혼자 있을 때 마음속으로 각각의 입장을 천천히 말해보는 것도 좋다. 중요한 건, 어느 한 쪽의 감정을 서둘러 설득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의 순간에 “너 그러면 안 되지”라는 자기검열로 자신을 몰아세우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감정은 억눌리고 억눌린 감정은 나중에 더 깊은 불편함으로 되돌아온다. 감정은 말을 걸어줄수록 누그러진다. “그렇게 느낄 수 있어. 충분히 이해돼.” 이 한 마디가 내면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시작이 된다. 실제로 내면의 두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감정과 사고 사이에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 공간이 확보될 때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고, 서두르지 않고 반응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즉각적으로 말을 내뱉기보다는 “지금 내 안에는 어떤 두 마음이 있지?”라고 질문해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질문 하나로 감정이 수용되고, 억울했던 마음도 “이제 나를 좀 알아봐주는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내면의 두 목소리를 들으려면, 자신과의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나, 상처받은 나, 참았던 나, 모든 목소리를 하나씩 들어보는 시간은 때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진짜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을 서로 대화하게 하면 좋다. “넌 참 이해심이 깊어. 근데 넌 왜 자꾸 화만 내?” “나도 화내기 싫은데,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줘서 그래.” 이런 식의 상상 속 대화는 감정을 진정시키고, 두 감정의 균형점을 찾게 해준다. 감정은 결국 서로가 들리는 자리에 있을 때 부드럽게 해소된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들려야 할 이야기다. 내면의 두 목소리는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정직한 안내자다. 우리는 종종 외부 사람들의 조언에는 귀를 기울이면서, 정작 내 안에서 가장 크게 외치는 감정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지키려 했고, 나를 설명하려 했으며, 나를 대변하려 했던 소중한 신호였다. 이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둘 다 틀리지 않았고, 둘 다 필요한 마음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의 두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나는 참 복잡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 말 속에는 비난이 아닌 수용이 담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외면했던 나를 껴안고, 억눌렀던 마음과도 대화를 나누며, 나라는 존재가 가진 모든 색을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을 통합하고, 현실을 부드럽게 살아가는 마음의 기술이다.

5. 감정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루틴

감정은 머리로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마음의 작용인 동시에, 몸을 통해 반응하고 저장되는 에너지다. 어떤 감정은 눈앞에서 잊혔다고 생각되지만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고, 어떤 감정은 말로는 다 풀었다 해도 목이나 어깨에 긴장으로 남아 뭉쳐 있다. 그래서 진짜 감정 다루기는 몸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다. 감정은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흘려보내는 과정을 통해 해소된다. ‘두 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것이 여전히 몸 안에 남아 긴장을 유발한다면, 우리는 그 감정을 완전히 수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루틴은 거창하거나 특별할 필요가 없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느껴보는 것, 그리고 그 반응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서운함이 올라올 때는 가슴이 조여들고 한숨이 깊어질 수 있다. 그때는 억지로 괜찮은 척하거나,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 대신, 조용히 그 감정을 따라가는 식으로 몸을 맡겨본다. 등이나 어깨가 구부정해지고 싶은 대로 해보고, 하품이 나오면 억지로 참지 말고 크게 내뱉는다. 몸의 반응은 감정이 흘러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따라갈수록 억눌렸던 감정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간다. 이 루틴을 습관처럼 실천하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흘려보내는 능력이 점점 길러진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어떤 느낌인지 먼저 확인해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저녁에 잠들기 전 그날 가장 강하게 느꼈던 감정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조용히 스캔해보는 것도 좋다. 목이 답답하면 그 감정이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일 수 있고, 가슴이 조여온다면 오랫동안 외면한 슬픔일 수도 있다. 이처럼 감정은 신체 감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몸에 집중하는 루틴은 곧 감정을 해소하는 루틴이 된다.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명상, 호흡법도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깊은 복식호흡을 하며, 내쉬는 숨에 “괜찮아, 너도 있었구나”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해보자. 그 말과 함께 긴장이 빠져나가면서, 억눌렸던 감정도 조금씩 힘을 잃는다. 특히 명상 중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을 억지로 떨쳐내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게 두는 연습은 내면에 놀라운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감정은 존재 자체로 허락받는 순간, 저항을 멈춘다. 그리고 저항이 멈추는 그 자리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 루틴은 감정을 더 깊이 느끼고, 그 느낌을 통해 나를 이해하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하루 중 누군가의 말에 서운함을 느꼈다면, 그 감정이 남아 있는 장소를 내 몸에서 찾아본다. 그리고 그 부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해준다. “여기에 그 마음이 남아 있었구나. 지금껏 말도 못 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말하고 나면, 몸이 조금 느슨해지거나, 저절로 숨이 깊어지는 경험이 찾아온다. 이 조용한 감각의 흐름이야말로, 감정이 진짜로 떠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감정을 몸으로 느끼고 흘려보내는 루틴을 자주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더 이상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억눌리지 않고도 견딜 수 있고, 표현하지 않아도 흘려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이는 결국 삶의 리듬 자체를 부드럽게 바꾸어 놓는다.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고, 그 감정들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마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나의 내면이 넓고 유연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너비는 내 삶을 평화롭게 이끄는 기반이 되어준다. 이제 감정이 올라오면 참거나 억누르지 말고, 내 몸이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자. 몸은 늘 정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그 신호를 따라갈 때 마음도 함께 치유된다. 감정을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고, 흘려보내는 이 일상적인 루틴은 특별한 도구나 시간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최고의 마음 돌보기다. 그리고 이 작은 연습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두 개의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조화롭게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게 된다.

두 마음을 함께 안는다는 것, 그건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늘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이해하거나 미워하거나, 참거나 터뜨리거나—마치 감정에는 정답이 있는 것처럼 한 가지 마음만을 선택해야만 올바른 사람인 양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삶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가르침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복잡한 마음의 공존을 인정하는 데 있다. 이해하면서도 억울하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고마우면서도 아픈 감정들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억눌림 없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글을 통해 나눈 다섯 가지 실천법—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연습, 미워하는 나에게 다정하게 말 걸기, 두 감정을 함께 써보는 마음일기, 갈등 속 내면의 두 목소리를 번갈아 듣는 연습, 그리고 감정을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루틴—이 모든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에게 다가가는 작은 길이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깨닫는다. 억눌러야 했던 감정들이 사실은 나를 지키려 했던 목소리였고, 미움 속에는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질투 속에는 인정받고 싶은 내면의 아이가 있었음을.

두 개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다는 의미다. 그것은 자기 수용의 가장 깊은 단계이며, 마음의 성숙이 시작되는 자리다. 더 이상 ‘착한 나’만을 내세우지 않아도 되고, ‘이기적인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모든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바라보고, 느끼고, 듣고, 받아들이는 하루하루가 쌓이면 우리는 점점 더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간다. 외부의 변화가 없어도,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때 삶 전체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흘러가게 두는 일은, 마치 냇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단순하다. 그 흐름을 믿고 가만히 기다릴 줄 알면, 감정은 늘 스스로의 방식으로 나를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이제는 그 흐름을 억지로 조절하지 않고, 두 개의 마음이 동시에 숨 쉬는 내면의 공간을 허락하자.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부드럽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간다. 오늘도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다가 문득 미움이 올라온다면, 그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이렇게 말해주자. “그래, 네가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그 한마디가 상처 입은 마음에게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두 마음을 함께 안고, 하루하루 더 넓은 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 길 위에 있는 당신에게— 지금의 이 연습이 평온한 나로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